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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메디치 TMI 톡커를 맡은 변선경입니다.
여러분은 메디치 가문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계신가요? 피렌체에서 르네상스를 일으킨 위대한 은행 가문으로 많이 알고 계실텐데요. 그런데 메디치 가문에 대해서 상반된 평가가 있다는 거 알고 계신가요?
20세기 후반 영국의 르네상스 연구가 존 릭비 헤일은 자신의 책 “피렌체와 메디치”에서 메디치 가문에 대한 두 가지 신화에 대해서 말했는데요. 메디치 가문이 은행업을 통해서 번 돈으로 예술과 학문에 대한 르네상스를 일으켰다는 신화는 우리도 잘 알고 있지요? 헤일은 그뿐만이 아니라 메디치 가문이 민주적인 대중으로부터 교묘하게 자유를 빼앗았다는 검은 신화도 존재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상반된 평가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과연 어떤 평가가 올바른 평가일까요? 저 멀리 지구 반대편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 대답은 메디치 가문의 ‘신화’를 벗겨낼 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신화’를 벗겨낸 메디치 가문의 역사 속 여정을 저와 함께해 보시죠!
여러분이 피렌체, 혹은 토스카나 지역을 여행하다보면 곳곳에서 6개의 빨간 공이 달려있는 금색 방패의 문장을 발견하실 수 있는데요. 바로 메디치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랍니다. 메디치 가문은 어쩌다 이런 문장을 사용하게 된 걸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요, 그 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아마도 메디치 가문의 이름이 이탈리아어로 의사를 뜻하는 메디코(medico)에서 유래했다는 주장과 함께 빨간 공이 알약을 뜻한다는 설일 겁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16세기 프랑스로 시집을 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출신을 비웃으려고 프랑스 궁정에서 퍼졌던 이야기입니다. 메디치가 의사 가문 출신이었다는 것은 사실 확인된 바가 없답니다.
최근 가장 유력한 설은 바로 메디치 가문이 속했던 길드의 상징을 모방했다는 설인데요. 바로 환전상 길드 문장의 주화 모양을 모방했다는 주장입니다. 빨간 방패에 노란 주화가 여러 개 그려진 모양이 마치 메디치 가문의 노란 방패에 빨간 공이 달려 있는 모양을 반전한 것과 비슷하거든요. 바로 여기서 메디치 가문의 주력 사업을 짐작해보실 수 있겠죠?
네, 맞습니다. 바로 은행업이랍니다. 유럽에서는 13세기부터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은행업이 새롭게 성장하기 시작했는데요. 여기에 두각을 드러낸 것이 바로 이탈리아의 은행가들이랍니다. 그러나 그들도 14세기 중반 흑사병과 백년 전쟁의 여파로 휘청거리기 시작합니다. 남의 위기는 곧 나의 기회라고 했던가요? 피렌체 큰 은행들이 줄도산 하는 위기의 순간인 바로 그 때! 그 공백을 채우며 빠르게 성장했던 한 가문이 등장합니다.
바로 메디치 가문이었죠.
메디치 가문은 원래 피렌체 인근에 위치한 작은 도시, 무젤로의 한 가문이었습니다. 그들은 12세기 말 그곳을 떠나 피렌체의 산 로렌초 성당 인근에 정착했는데요. 이 시기 메디치 가문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지만, 13세기 말까지 환전상으로 성장해 곧 피렌체 시정부에서 여러 공직을 맡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14세기에 메디치 가문이 아무런 문제없이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상당수가 사망하면서 기존 사회가 붕괴되고, 사회 변화와 함께 계층 간의 갈등도 나타나던 14세기에 메디치 가문도 그 파란을 피하지는 못했겠죠?
피렌체에서는 촘피라고 불리는 양모업 노동자들이 정치에 배제된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면서 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1378년 촘피의 난입니다. 바로 이 시기 피렌체시의 정무 위원 중 한 명이 공교롭게도 메디치 가문의 살베스트로라는 인물이었답니다. 그는 과거 엘리트층을 견제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노동자들을 지지하였지만, 4년 만에 촘피의 정부가 무너진 후에는 반역자로 몰려 추방을 당하는 불운한 인물이었는데요. 바로 이 사건을 계기로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 정부의 중앙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살베스트로 이후에 메디치 은행 사업을 인수했던 인물은 그의 사촌 비에리입니다. 비에리는 메디치 가문에서 유일하게 국제적인 규모의 무역과 금융업에 종사했던 인물인데요. 그는 피렌체를 넘어 로마, 베네치아 등에 환전 사무소를 열고 피사 항구를 통한 수출입 무역에 전념하면서 메디치 가문을 다시 성장시키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사촌 살베스트로의 예시 때문이었을까요? 사업에서는 과감한 모습을 보였던 비에리는 공직을 맡더라도 정치적으로 꽤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비에리의 이러한 행보는 앞으로 메디치 가문의 성장 기반을 마련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그 이야기는 비에리의 먼 조카 조반니 디 비치로 넘어갑니다. 바로 메디치 가문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불리는 인물이지요.
여러분이 피렌체 산 조반니 세례당을 방문하시면, 한쪽 벽면에서 도나텔로가 조각한 한 교황의 무덤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바로 요한 23세의 무덤인데요. 여러분이 요한 23세를 검색하시면, 15세기 초 인물이 아닌 전혀 다른 인물이 검색되실 거예요. 로마 교황청에서는 15세기 초의 요한 23세를 교황으로 인정하기 않기 때문인데요,
도대체 왜 그런 교황의 무덤이 피렌체에 있을까요?
이 이야기는 서방 교회 대분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4세기 교황과 갈등을 빚던 프랑스 왕이 교황을 프랑스의 아비뇽이라는 도시에 억류하는 사건, 즉 아비뇽 유수가 일어납니다. 교황청은 70년 뒤에야 드디어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답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문제는 로마로 돌아온 교황이 사망하고 나서 시작되었습니다. 과거 교황청이 있던 아비뇽과 현재 교황청이 위치한 로마에서 각각 후임 교황을 선출하면서 너도 나도 교황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던 거죠.
혼란이 계속되자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결국 피사공의회가 열리면서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게 되는데요,
이 때 뽑힌 인물이 발다싸레 코사, 즉 대립교황 요한 23세랍니다.
그가 교황으로 뽑힐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메디치 가문의 조반니 디 비치가 그를 추기경, 그리고 교황으로 선출되는데 까지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조반니 비치는 무슨 돈으로, 왜 그를 지원했을까요?
사실 조반니 디 비치는 부친으로 부터 큰 재산을 물려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그가 큰 부를 쌓게 된 데에는 국제적인 사업가로 성장했던 먼 친척 비에리의 도움이 컸죠.
그의 아래서 은행업을 익혔던 조반니는 아내의 지참금을 투자하여 은퇴한 비에리의 로마 은행을 인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397년 피렌체로 은행 본점을 이전하면서 본격적으로 메디치 은행이 탄생했습니다.
다른 도시에도 은행 지점을 열었지만, 여전히 로마 지점이 전체 수익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만큼 로마는 그의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죠. 로마의 교황청은 그리스도교인들이 교회에 내는 십일조 등으로 여러 국가에서 수익을 모으는 유일한 권력인 만큼 중요한 고객이었습니다. 따라서 교황청과의 연줄이 필수적이었겠죠? 당시 이 교황청의 재정을 관리하던 인물이 바로 발다싸레 코싸, 이후 대립교황 요한 23세가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조반니 디 비치는 그와 이익을 공유해 오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바로 이것이 조반니가 발다싸레 코싸가 교황에 오르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많은 자금을 지원 했던 이유입니다. 실제로 그 역시 자신을 물심양면 지원해준 조반니 디 비치에게 교황청의 재무와 이권 사업을 맡기면서 보답해 주었습니다. 요한 23세 역시도 교황권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조반니 디 비치의 재정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서로 윈윈 관계였던 셈이죠.
그러나 결국 요한 23세는 교회 대분열을 수습하는데 실패하면서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폐위가 되고 맙니다. 당시 요한 23세는 수많은 의혹에 연루되었는데요, 전임 교황을 독살했다, 200명이나 되는 여성을 유혹했다 등등이었죠. 그 중에서는 메디치가문의 자금 지원으로 요한 23세가 추기경 자리를 샀다는 의혹도 있었습니다. 결국 당시 요한 23세와 콘스탄츠 공의회에 동행했던 조반니 디 비치의 장남 코지모 데 메디치가 이 문제로 요한 23세와 함께 투옥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맙니다.
조반니 디 비치는 거액을 직접 지불하면서 석방을 이끌어내게 되는데요, 1419년 석방된 요한 23세는 자신에게 끊임없는 호의를 베풀었던 조반니 디 비치가 있는 피렌체로 향합니다.
그리고 그 해 사망한 요한 23세는 자신의 유언 집행자 중 한 명으로 조반니 디 비치를 지정하는데요, 그렇게 조반니 디 비치와 그의 아들 코지모가 요한 23세의 무덤 건립 책임을 맡으면서 지금도 피렌체 산 조반니 세례당에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답니다.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요한 23세 덕분에 교황청 재무를 담당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메디치 가문은 이후에도 꾸준히 교황의 은행가로서 활약할 수 있게 됩니다. 당시 교황청은 그린란드를 포함해 유럽 전역에서 재정을 확보하는 유일한 기구라는 특수성 때문에 아무나 교황의 은행가로 임명할 수 없었습니다. 도시 사이의 위험한 여행길, 후진적이고 부족한 은행시설 등을 극복하며 국제 송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은행가라야 했죠. 당시에 폴란드에서 자금 이체하는데 만해도 6개월 이상 걸리기도 했다니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지요.
따라서 유럽에서 가장 신속하고 효율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유명했던 이탈리아 은행가들, 그 중에서 이탈리아와 알프스 너머까지 광범위한 지점 네트워크를 가진 피렌체의 은행이 교황의 재무를 담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국제적인 무역으로 유명한 베네치아나 제노바의 은행들은 그런 대규모 조직을 구축하지 않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이미 국제적으로 여러 은행지점을 보유하고 여러 도시에서 투자 수익을 올리고 있던 메디치 가문은 요한 23세 때 교황의 은행가로서 자신들의 실력을 입증하면서, 15세기 동안 대부분의 교황들이 가장 선호하는 재무 책임자가 될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메디치 가문을 외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중요한 가문으로 부상시켰습니다.
Ciao! 이탈리아사의 매력에 푹 빠져 피사대학교에서 박사학위까지 공부한 TMI 톡커입니다.
이탈리아. 역사도 깊고 볼 것도 많은 건 알겠지만, 도대체 어떤 역사를 가졌는지 잘 몰라 답답했던 경험 있으신가요? 오랜 공화정의 전통을 가지고 도시국가로 쪼개져 있던 이탈리아의 역사가 낯설게 만 느껴지셨을 텐데요. 피렌체와 피사에서 공부하며 직접 눈으로 보고 발로 누볐던 역사학자의 경험으로 여러분들에게 이탈리아에 관한 재밌는 역사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