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사말

본조르노! 이탈리아의 역사와 예술을 재미있게 소개해드리는 이탈리아 국가 공인 가이드 키아라입니다.
우리가 함께 여행할 곳은 밀라노 여행의 이유! 그 누군가는 오로지 이 작품 감상만을 위해 밀라노를 목적지로 정한다 할만큼, 유명하고도 아름다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보려고 합니다. 정확하게는 이 작품이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한국어로 옮겨보면 은총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 딸린 수도원 식당이예요.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작품 중 하나인 최후의 만찬인지라, 워낙 많이 알고들 계실텐데… 이 투어에서는 작품을 감상하시면서 이 작품이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특별한 지, 이 그림을 그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한 이야기와 또 작품이 이후 훼손되고 복원되었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그런데 아시나요? 이 작품은 역시나 명성만큼 사실 그냥 볼 수 없는 상태예요. BTS나 임영웅 콘서트급은 아니지만 나름 여행중 티켓 예매 중엔 가장 빡세기로 유명한 장소입니다. 무조건 가기 전에 예약을 해야만 하거든요.
티켓 예매사이트는 3개월 전 오픈이 되는데 한 타임에 단 30명, 그리고 감상할 때에는 단 15분만 감상이 가능해요. 그래서 성수기는 모든 시간이 금방 매진되기도 하기 때문에 여러분 일정에 따라 가능하면 일정 정해지는대로 예매사이트 현황 확인하면서 예약 미리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만약 혹시 예약이 안되었다해도 너무 간절하면 계속 취소자리가 올라오는 지 확인해보거나, 또는 간단한 영어 실력이면 가능한 전화예약, 그것도 안되면 당일날 취소자리가 있는 지 아침에 직접 매표소로 찾아가볼 수 있기는 해요. 물론 복불복이기는 하지만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휴 콧대 높다!란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데요. 그 정도로 볼 가치가 있나.. 하실 수도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전 가이드생활 첫 해에 이 작품을 보러 밀라노를 갔다가 너무 감동해서 펑펑 우는 바람에… 정말 말 그대로 이 작품의 여운에 빠져 벅차하다가 돌아오는 길 지하철에서 지갑을 털렸습니다. 허허허 정말 밀라노 소매치기들도 어마어마해요.
밀라노 시내 한 중심가는 아니기 때문에 보통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게 될텐데, 항상 오가는 길 소매치기 조심하시구요. 또 한가지 정말 중요한 것! 가끔 시간 빠듯하게 움직이시는 케이스들이 있는데, 최후의 만찬 보러 가실 때에는 넉넉하게는 20분 전, 최소 10분전에는 매표소에 도착하시는게 좋습니다. 티켓 예매하면서 받은 이메일을 실물 티켓으로 받으셔야 하거든요. 그리고 여러분 예약시간부터 작품감상을 하는 것이라 그보다 5분전쯤 해당 시간 팀을 모아 관람대기 장소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합니다. 이 때 늦으시면 관람 못하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꼭꼭 여유있게 도착하시는 것 잊지마세요?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대로 정해진 시간에 단 15분만 감상이 가능해서 이 곳 역시 간단한 미리듣기 챕터를 만들었어요. 미리듣기 챕터에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이라고 제목을 붙이긴 했지만, 사실 성당 내부에 대한 자세한 설명보다는 이 성당을 짓도록 했던 밀라노 군주, 루도비코 일 모로. 그가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밀라노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하고, 최후의 만찬을 주문하기도 했던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간단한 성당 역사와 밀라노 군주 루도비코,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밀라노 생활에 대한 이야기 준비해봤습니다. 작품 감상하기 전에 미리 들어주시면 좋구요. 작품 감상은 딱 15분만 가능하기 때문에 이 곳 또한 작품 설명 미리 듣고 온전히 여러분의 작품감상에 할애하셔도 괜찮습니다. 감상에 집중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서 바흐의 마태수난곡 중 최후의 만찬 일부도 함께 들으실 수 있으니 참고해주세요.
마지막으로 잊지 마시고 투어를 사전에 다운로드해두시면 여행 중 투어 재생할 때 조금 더 편하실 거예요. 유럽 성당이나 박물관은 특히 휴대폰 통신이 잘 안잡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강조드리고 싶구요.
어플을 통해 투어를 이용하실 때 재생하면서 기본적인 속도조절이나 구간 이동도 가능하구요. 또 재생 중에 나타나는 빨간 선을 꾹 누르면 앞 뒤 5초간 구간 이동 외에도 자유롭게 원하는 만큼 재생바를 이동할 수 있답니다. 오디오 가이드의 장점 중 하나가 놓쳤을 때 다시 듣기가 가능하다는 점이니만큼, 여행 중에 잘 활용해주시면 좋겠습니다.
2[여행전듣기]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여행전듣기]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https://static.tourlive.co.kr/static/tour/2022/06/02/tour_track/10022/907d5f46e24411ec9e7102420a0000f3/resize/image/1654154465_Lastjudgement_img25_resize.jpg)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감상하러 가는데 왠 성당? 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으실텐데요. 최후의 만찬 작품이 바로 이 성당,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과 연결된 도메니코회 수도원의 식당 벽에 그려진 작품이랍니다.
참고사진 보시면 붉은색 벽돌의 심플한 정면을 가진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의 정면을 보실 수 있는데요. 보통 지하철 타고 오시면 성당 뒤쪽에서 오게 되서 이 정면이 마지막에 보이니까 참고하시구요. 정면 왼쪽으로 베이지 색 건물에 빨간색 현수막이 걸려있는게 보이실텐데 이 곳이 바로 최후의 만찬 티켓 오피스예요. 여기서 온라인 예매한 티켓을 실물 수령하고 그 안쪽으로 입장하게 되요.
혹시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시거나 또 작품 감상하고 시간 여유가 있다면 잠시 이 성당도 함께 들어가보시면 좋을텐데요. 이 미리듣기 챕터에서 성당을 자세히 소개드리는 건 아니고, 성당의 간략한 역사, 그리고 이 성당을 지은 스포르차 가문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지금도 일명 ‘패션의 도시’ 밀라노로 유명하지만 꼭 패션뿐 아니라 밀라노는 북부 지역에 상업의 중심지역으로 사실상 자신들이 수도나 마찬가지다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중세부터 밀라노 공국은 중계무역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유럽에서 최고로 부유했던 지역이었답니다.
그런데 다른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공화정에 가까웠던 때부터 밀라노는 13세기 비스콘티 가문, 그리고 1450년부터는 스포르차 가문의 지배를 받으면서 사실상 군주국가의 형태를 띄는데요. 비스콘티 가문의 남자 혈통이 끊기면서 전쟁이 일어나자 용병대장이었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권력을 장악하고, 비스콘티 가문의 비앙카와 결혼하면서 밀라노 대공이라는 지위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은 바로 이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짓도록 지시한 성당인데요. 원래 이 자리에 ‘원래 이 자리에 ‘은총의 성모 마리아’ 그러니까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치에에게 봉헌된 작은 예배당과 군대를 위한 안뜰 자리로 사용되었던 것을 도메니코 수도회에게 기증하면서 1463년 성당 건축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수도원은 불과 6년만인 1469년에 완성이 되었지만 성당은 좀 더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요. 처음 성당을 짓도록 했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아들 루도비코가 권력을 잡으면서 이 곳을 스포르차 가문을 위한 성당으로 짓도록 하면서 좀 더 규모가 커져서 1497년에 이 성당이 완성되었습니다.
잠시 참고그림 보시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초상을 확인해보실 수 있는데요.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 머물 때의 밀라노 지배자가 바로 이 사람이었습니다.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별명이 하나 있는데, 무어인처럼 까만 피부에 까만 머리카락을 가졌다고 해서 il moro라고 불리웠던 사람이예요. 루도비코가 다스리던 때의 이탈리아 반도는 끊임없이 프랑스가 이탈리아 도시국가를 호시탐탐 탐내던 때라 그 길목에 있던 밀라노는 계속 전쟁에 휘말렸던 때이기도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82년, 그의 나이 서른일 때에 이 루도비코 일 모로의 후원을 받으면서 밀라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1499년, 루도비코가 권좌에서 물러날 때까지 약 17년간을 밀라노에서 머물면서 루도비코의 전속 화가이자 엔지니어, 조각가, 궁정 연회 기획자, 토목 건축 및 군사 문제 기술 고문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그래서 실제 밀라노 여행을 하다보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설계한 나빌리오 운하도 있고, 또 그의 작품 중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암굴의 성모나 또 흰 담비를 안은 여인 등을 비롯해서 밀라노에서 6점의 회화작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또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것 중 하나는 바로 기마상을 제작하는 것이었는데요.
앞서 말씀드린 레오나르도의 후원자 루도비코! 루도비코가 자신의 아버지 프란체스코 루도비코를 위한 기마상을 만들고자 했는데, 참고사진처럼 스케치나 진흙모형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전해지지만 결국 청동기마상으로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또 밀라노가 전쟁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인데요. 결국 기마상을 만들기 위해 준비되었던 청동들은 무기를 제작하는데 사용되었고, 레오나르도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처럼 오랜 시간 준비했던 기마상 제작을 포기하게 되었어요. 청동 기마상은 만들지 못했지만 이를 위해 만들었던 점토기마상이 있었는데 이 또한 나중에 파괴되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구상했을 기마상은 상상밖에 할 수 없는데요. 만약 이게 만들어졌었다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일한 조각상이 되었을 수도 있고 말이죠.
자, 이런 상황에서 그 때 후원자인 루도비코는 기마상 대신 레오나르도에게 다른 작업을 지시하게되고, 그곳이 바로 자신의 집안 영묘로 활용하려고 마음 먹은 이 성당, 수도원. 벽화를 그리도록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밀라노 생활 13년차, 43살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나는 기적을 행하고 싶다’라고 노트에 적으며 이 최후의 만찬 작업을 시작합니다.
자, 실제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최후의 만찬 작품을 감상하면서 들어주시구요. 그렇게 레오나르도는 이 작품을 그리게 되지만, 작품 완성 1년 후인 1499년 프랑스가 밀라노를 침공하고 루도비코가 프랑스에 포로로 끌려가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밀라노 생활도 마무리하게 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 밀라노에 머물면서 고향인 피렌체에서보다 좀 더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는데요. 아무래도 자신이 하고자 했던 연구활동을 하면서도 꾸준히 안정적인 수입이 들어올 수 있는 후원자의 힘이 컸을 겁니다.
이제 곧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남긴 가장 아름다운 걸작, 최후의 만찬을 만나실 여러분. 의외로 이탈리아에서 레오나르도의 흔적을 많이 만날 수 없어 아쉬웠을텐데 오늘 이 곳에서 흠뻑 작품에 취해보시길 바랄게요.
아! 그리고 이 성당 들어가시게 되면 그 무엇보다 가장 안쪽으로 중앙 돔을 중심으로 내부도 둘러보시면 좋겠어요. 잠시 참고사진 보시면 단아하면서도 반복적인 장식이 세련된 돔들을 보실 수 있는데요. 르네상스 최고의 건축가 중 하나인 브라만테의 설계로 만들어진 곳이랍니다. 루도비코 일 모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뿐 아니라 이탈리아 중부 우르비노 출신의 브라만테 역시 초빙했었거든요. 브라만테는 나중에 로마로 가서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의 첫번째 건축을 시작했던 인물이기도 하죠?
작은 성당이니 최후의 만찬 감상 전후로 시간 될 때 둘러보실 수 있다면 한 번쯤 다녀와보세요. 즐거운 시간이 되시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