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어로 '포로'라고 하면, 가이드북이나 관련 서적에서 보통 한국어로 '공회당'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하지만 공회당이라는 단어가 왠지 와닿지는 않죠. 그렇다고 해서 또 영어로 '포럼'이라고 하면, 영어식 표현도 사실 완벽하게 이 곳을 직관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하는 것이, 공회당보다는 실생활에서 좀 더 자주 쓰는 단어니까 익숙하긴 한데 우리가 아는 포럼은 좀 더 회의장, 세미나, 토론 장소 이런 느낌이 강하잖아요.
그런데 이곳은 앞 챕터에서 언급한 것처럼 말 그대로 거대한 공간 안에 정치, 경제, 종교, 행정의 기능을 하는 모든 건물들이 동시에 있는 장소였어요. 예를 들면, 포로 로마노 안의 길을 걸으면 우리 식으로 법원이 있고 시청사도 있고 국회의사당도 있고 동사무소가 있고 명동 성당과 봉은사가 있고 남대문도 있고 유명한 영어 학원도 있고 수학 학원도 있고 이런 식인 거거든요. 그러니 로마인들이 중요한 볼일이 있거나 혹은 사소하게라도 장이라도 볼라치면 이 곳, 포로 로마노를 방문했던 겁니다. 또 정치의 공간들도 있으니 로마의 중요한 역사적인 일들도 바로 이 곳, 포로 로마노에서 모두 이뤄졌던 것이고요. 그래서 말 그대로 로마의 심장 역할을 했던 곳이 바로 포로 로마노인 것인데요. 그렇다면 이곳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수도 로마는 계획 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바로 이 포로 로마노인데요.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를 이해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짧지만 꼭 들어주시고 가시면 좋겠습니다. 로마의 건국 신화는 로물루스가 팔라티 언덕의 나라를, 그리고 동생 레무스가 아벤티노 언덕의 나라를 각각 세웠다가 형제 간의 다툼에서 승리했던 형 로물루스가 세운 팔라티노 언덕에 그의 이름을 딴 로마라고 하는 나라가 세워지면서 기원전 753년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하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왜 굳이 힘들게 언덕에 올라가 나라를 세웠을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는데요. 기원전 8세기 당시 로마의 일반적인 평지일 때는 늪지대가 많았고 자연스럽게 모기는 기본이고 전염병이 쉽게 돌 수 있는 환경이라 이 평지에는 사람들이 모여 살긴 좋지 않은 환경이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초대왕인 로물루스가 팔라티노 언덕에 나라를 세운 이후 인구가 늘 때마다 언덕을 하나씩 분양을 해주게 되죠.
팔라티노 언덕 그리고 아벤티노 언덕을 시작으로 첼리오, 에스퀼리노, 비미날레, 퀴리날레, 그리고 캄피돌리오까지 이렇게 총 7개의 언덕에서 로마가 시작됐기 때문에 로마의 역사 시작을 설명을 할 때는 로마는 7개의 언덕에서 시작되었다라고 항상 이야기를 하죠.
그런데 점점 인구가 늘어날수록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공간도 많아지는데 언덕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죠. 가장 먼저 로마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팔라티노와 아벤티노 언덕 사이의 공터, 그러니까 지금의 치르코 마시모, 대전차 경기장 자리를 먼저 활용을 했었는데요. 이곳은 축제와 경기 등을 치르는 장소로 활용을 했었고 그 다음으로 언덕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장소가 현재의 포로 로마노 자리입니다. 자연스럽게 언덕 중심에 있는 평지, 즉 교통의 중심지인 이 자리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는데요.
정말 재미있는 게 이탈리아어로 포로, 그러니까 지금의 이 공간 어원은 원래는 '바깥'을 의미하는 '포리스'라는 단어에서 왔다는 거죠. 즉 이 공간의 어원은 로마의 바깥을 의미하는 건데 초창기 로마인들은 이 언덕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날 때 '우리 로마 바깥에서 만나'라고 이야기를 했던 것이 자연스럽게 현재의 포럼이 되었던 거죠. 필요하기 때문에 시장이 가장 먼저 생겼을 것이고 사람이 많이 모이니 워낙 초기부터 선거가 발달했던 로마에서는 정치인들이 시장을 먼저 찾아 연설을 했을 거예요. 다신교의 로마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자연스럽게 온갖 신전들이 생기기 시작했을 것이고 또 이쯤 되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공간들은 이곳에 함께 모이기 시작했던 겁니다. 로마의 바깥이었던 곳이 자연스럽게 중심이 되었던 거죠. 그런데 다시 한번 의문점이 듭니다. 언덕이 아닌 평지는 늪지대였다라고 방금 가이드가 말씀을 드렸는데 '어떻게 이런 공간이?'라고 분명히 똑똑한 여러분은 궁금하셨을 거예요.
이미 초대왕 로물루스 때에 흙으로 메워 이 공간을 활용하기 시작은 했지만, 더 정확하게 포로 로마노를 현재의 모습이 될 수 있도록 최초의 도시 개발을 했던 사람이 별도로 있습니다. 바로 고대 로마의 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선한 왕이라고 하는 별명으로 불리우는 사람인데요. 제가 로마 역사에서 또 좋아하는 사람을 한 명 더 소개해 드릴 수 있어 기쁘네요. 로마는 로물루스가 건국 때부터 인구를 늘리기 위해 범죄자나 망명자 등을 포함해서 이 로마라는 나라를 시작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민족으로 시작을 합니다. 타르퀴니우스라는 인물도 원래 로마인이 아닌 이탈리아 중부 지방에 넓게 퍼져 있었던 에트루리아라고 하는 도시 국가 출신이에요. 에트루리아의 부유한 귀족이자 야망도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가 에트루리아의 공직에 나갈 수 없었던 건 바로 혼혈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그리스인, 어머니가 에트루리아인이었는데 문제는 당시 아무리 귀족이고 부유해도 양쪽 국가 모두 혼혈인을 정식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타르퀴니우스는 부인의 권유로 출신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로마로 망명을 떠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외국인이지만 바로 열린 로마의 왕 선거에 적극적으로 선거운동을 하고 또 더 놀랍게도 5대 왕이 되었던 겁니다. 그의 출신 지역인 에트루리아는 사실 고대 로마의 다방면에 영향을 주었는데, 그중엔 뭐 검투 경기도 있고 아치도 있지만 여기서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건 바로 하수도, 지금의 포로 로마노에 이 하수도 유적이 남아 현재까지도 빗물 등은 그대로 내보내기도 하는데요. 대하수도라고 하는 의미의 '클로아카 마시마'를 기원전 5세기 초쯤에 만들고 이 습지를 마른 땅으로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위에 돌로 포장을 해서 도시화 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물론 그 이후 수많은 건축물이 세워지면서 끊임없이 변화를 하긴 했지만, 다행히 로마의 공식 연표를 포함한 제사장 연대기에 건축물들에 대한 기록이 남겨져 있어서 이를 바탕으로 포로 로마노를 이야기 드릴 예정입니다. 또 2700년 전부터 로마의 왕정 시대부터 만들어진 공간이긴 해도 사실상 현재 여러분이 보신 포로 로마노의 모습은 그 이후로 끊임없이 채워져 로마 재정 시대에 만들어진 건축물이 더욱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상상 복원 자료의 그림들은 기원 후 재정 시대의 모습으로 감안을 해 주시면 좋겠어요.
로마의 바깥, 하지만 로마의 심장이 되었던 포로 로마노. 본격적인 시작은 티투스 개선문 또는 포리 임페리알리에 있는 입구로 입장한 후 이야기가 시작이 됩니다. 우리는 포로 로마노 안에서 다시 만날게요.
00:00 포로 로마노가 무슨 뜻이야?
01:24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03:26 어원을 알아보자
04:32 타르퀴니우스 이야기
07:08 이제 입장할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