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사말
그럼 임가화원에 가기 전에 딱 세 가지 꿀팁 알려드릴게요!
첫째, 아침 일찍 방문하자!
개인적으로 아침 일찍 가시는 게 사진 찍기에도 좋고 한적해서 추천드려요. 호텔 등에서 아침 식사 후 바로 출발하셔도 좋고요. 아니면 먼저 임가화원 근처로 이동하신 뒤 간단하게 아침을 드신 후 둘러보시는 것도 괜찮다 싶습니다. 오후에가면날씨가너무더울수도있고, 사람도많거든요. 특히 주말에는요.
둘째, 밝은 옷을 입고 가자!
임가화원이 포토스팟이라고 말씀드렸죠? 원색 계통의 밝은 옷을 입고 가면 빈티지한 배경과 대조되어 사진이 더욱 예쁘게 나옵니다.
셋째, 나무가 많고 습해서 모기가 많을 수도 있어요. 저는 물린 적은 없었는데, 혹시 모르니 모기약 챙겨가세요.
자 그럼 저와 함께 임가화원 여행을 떠나볼까요? 오늘 저와 함께 여행을 마치고 나면 임가화원의 매력에 흠뻑 빠지실 겁니다. 잘 따라와 주세요!
2[여행전듣기] 임가화원 입장 전에 이것만큼은 알고 가자
![[여행전듣기] 임가화원 입장 전에 이것만큼은 알고 가자](https://static.tourlive.co.kr/static/tour/2021/10/19/tour_track/8971/f8f8f132308011eca59102420a000067/resize/image/1634609103_1634609086_linfamilygarden_img1033_resize.png)
본격적으로 투어 시작 전. 임가화원의 전반적인 역사에 대해 설명을 해드릴게요.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잖아요. 딱 5분만 미리듣고 가시면 임가화원을 이해하는 데 훨씬 더 도움이 되겠죠?
미리 숙소에서 듣고 가셔도 좋고, 가는 길에 들으셔도 좋습니다. 물론 도착하셔서 다시 들으셔도 좋습니다.
1847년 처음 지어진 임가화원의 원래 이름은 임본원원저(林本源園邸)입니다. ‘임’은 성을 의미하며 ‘본원’은 당시임씨후손 둘을 대표하는 호였습니다. ‘원저’는 정원과 큰집을 의미합니다.
원래 이름인 원저에서 볼 수 있듯, 이곳은 크게 두부분, 즉 정원과 집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어요. 바로 연못입니다. 임가화원은 건물, 정원, 연못 이렇게 크게 세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총면적만 6054평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인데요. 이렇게 말하면 규모가 상상이 안 가시죠?
대략 둘러보는데 40분 이상이 걸릴 정도로 크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미로처럼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어 찬찬히 둘러보는 즐거움이 있는곳이죠.
임가화원은 원래 임씨들이 계속 거주하다 이후 정원의 일부가 신베이시정부에 기증되었고, 1982년에 이르러서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 있게 되었는데요, 현재 이곳은 국가지정고적으로 등록되어 있고 대만의 옛 정원을 대표하는 곳으로 중국 고대 강남풍을 간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임가화원도 사실 많이 훼손되었던 것을 정부의 노력으로 최근에야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은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잠시 후에 해드릴게요.
임가화원은 인사말에서 잠깐 말씀 드렸듯이 중국 푸젠성 장저우에서 대만으로 최초로 이주한 임씨가문의 성공담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푸젠성 출신의 한족 가문인 이 임씨가문이 어째서 대만에 자리잡게 되었느냐를 이해하려면 대만의 역사부터 차근차근 살펴 봐야 하는데요. 대만사에서 임씨가문이 처음 이주한 이야기는 17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푸젠(福建) 장저우(漳州)에 살던 린잉인(林應寅) 사람은 대만으로 건너와 현 신베이시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교육기관인 서원 등을 세우고 가르침에 몸 담았다가 고향 푸젠 장저우로 돌아가는데요. 전문가들은 린잉인이 대만에 최초로 이주했던 린씨가문의 선조로 꼽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린잉인의 둘째 아들부터인데요. 둘째 아들 린핑허우(林平侯)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대만에건너왔다가 쌀상인에 의해 고용되어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업적 안목이 뛰어났던 린핑허우는 타이베이 단수이강의 운송을 보고 사업기회를 포착하게 되는데요. 그를 고용한 쌀상인으로부터 사업자금을 빌려 쌀무역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쌀사업은 그야말로 초대박을 터트리게 됩니다. 당시 타이베이 단수이강의 운송은 호황기였던데다가 쌀값까지 치솟았기 때문이었죠.
그뒤 린핑허우는 소금 무역으로 사업확장을 하면서 더 많은 부를 축적해 갔습니다. 그리고 마흔 살이 되가 되자 대만 생활을 청산한 뒤 중국 본토로 돌아가 7년간 광시성 류저우 지사로 일합니다. 하지만 그는 지사직을 사임한 뒤 대만으로 돌아왔습니다. 대만이 그리웠던 걸까요? 아니면 사업 때문이었던 걸까요?
아무튼 린핑허우가 대만으로 돌아왔을 당시 타이베이 단수이 지역에는 이주민간의 다툼이 심했는데요. 취안저우에서 온 이들과 장저우에서 온 이들간의 무력 충돌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이 다툼은 대만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지요. 린핑허우는 이러한 충돌을 피하고자 보다 안전한 타오위안시 다시구에 거쳐를 마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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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그는 현재 반차오로 이주해 방교성(坊橋城,팡차오청)이라는 성과 현 임가화원 내에 있는 필익관(弼益館,비이관)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임가화원의 시초가 됐습니다. 비이관! 잘기억해두세요. 계속설명하겠습니다.
장저우와 취안저우 사람들은 이때까지도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며 대치하고 있었는데요. 린핑허우의 다섯 아들 중에서 두 아들이 팡차오 장저우 거주민의 요청에 의해 비이관 옆에 큰 건축물인 삼락대착(三落大厝)을 3년에 걸쳐 짓습니다. 청나라 시대의 가옥의 모습을 재현한 초호화 스타일의 거주지로 정부 관료나 비지니스 파트너를 대접하기 위해 더 신경써서 꾸몄다고 하는데요. 이후 많은 이주자들이 이 인근으로 몰려 들었고, 임가는 취안 저우인들의 간섭을 피하고자 여기에 팡차오라는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가는 여기에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당대 유명 명사들을 교사로 초빙해 지역 사람들을 교육시키면서 대만 북부 지역 문화를 형성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후 임가화원을 만든 대만 이주 3세인 린웨이위안(林維源), 린웨이랑(林維讓)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문을 발전시켜나가면서 대만을 대표하는 부호로 완전히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임가는 금융업 등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부호 가문이라고 합니다.
이어 임가화원은 이 시대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 하게 되는데요. 최고의 재력을 지닌 임가가 거느린 이 일대는당대 세력 다툼을하던 장저우 사람들의 방어기지이자 주요 지휘소가 되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후에도 임가화원은 다시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일대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고, 심지어 일부 대만 본토인들도 여기에 살기 시작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300가구 1천여 명이 살았다는데요. 이렇게 인구수가 늘어나자 정부는 이곳을 특별행정구역으로 분류해 류허우리(留侯里)라고 명명했습니다. 리는 마을을 의미합니다. 임가 덕분에 이 지역이 특별행정구역으로 지정된셈이지요.
그런데, 늘어나는 주민들로 인해 불법 건축 행위가 심각해지면서 이 일대는 옛모습을 잃어 가기 시작합니다. 이에 사람들은 이 지역에 대한 보존의 목소리를 높였고,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1971년 현 신베이시인 타이베이현정부는 한 대학에 이 문제 해결을 위한 계획 수립을 위탁했고, 임가측은 1,100만 대만달러를 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100만 대만달러면 우리나라 돈으로 약 44억쯤 되는데요. 1970년대 44억이면 어마어마한 액수라 할 수 있지요.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한 끝에 1945년 이전 모습으로 복원하기로 결정됩니다. 1982년말 복원 사업이 시작돼 4년만에 복원이 끝났고요. 그 비용만 1억5600만 대만달러가 들어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비용은 행정원과 각계 부처가 비용을 부담한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정부의 노력 끝에 오늘날의 임가화원이 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라 할 수 있겠네요.
자, 여러분. 임가화원 역사 재미있게 잘 들으셨나요? 그럼, 본격적으로 출발해 보겠습니다. 임가화원 입구에서 투어를 시작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