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정태남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스트리아는 아주 작은 나라입니다. 국토는 남한 면적의 85% 정도밖에 되지 않고 전체 인구도 850만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매력이 넘치는 아주 아름다운 나라이죠. 이러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인구가 200만을 넘지 않는 아주 쾌적한 도시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빈은 라틴어와 이탈리아어 표기인 비엔나로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요. 비엔나이건 빈이건 도시명에서 느껴지는 어감처럼 빈은 무언가 달콤하고 세련되고 우아한 도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빈에서는 거리 곳곳에 세련되고 귀족적인 기품이 배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 이곳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들이 거주하던 거대한 제국의 수도였죠.
또 이곳은 음악, 미술, 건축 등 다양한 예술과 문화의 용광로였습니다. 게다가 빈은 로마 제국 시대부터 지금까지 2천 년 동안 이어지는 장구한 역사가 중첩되어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빈은 수많은 이야기가 곳곳에 비어있는 도시인 것이죠. 자, 이 오디오 가이드는 23일 정도의 한정된 일정으로 빈이라는 도시에 대해 전반적으로 알고 싶어 하는 여행자들을 우선적으로 고려했습니다. 그래서 잘 알려진 빈의 명소 약 20개를 선정하여 그에 관련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 명소들은 세 곳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시내 중심부에 몰려 있기 때문에 천천히 걸어서 모두 돌아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돌아보는 순서는 여러분들의 상황에 맞게 짤 수 있겠죠. 참고로 지명에 Markt, Platz, Straße, Gasse 등이 많이 보이는데요.
Markt는 시장이란 뜻으로 옛날 시장이었던 광장입니다. 그 중에는 물론 아직도 시장의 기능을 유지해오고 있는 곳도 있습니다. Platz는 그냥 광장이고요. Straße는 길 또는 거리입니다. Gasse는 좁은길입니다.

빈은 2천 년 전 로마군이 도나우 강변에 세운 요새 Vindobona가 기원이 됩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오랜 세월이 지난 기원 후 880년경에 이곳은 Wenia라고 불려지는데요. 이것이 나중에 빈이라는 도시명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12세기에 들어 이곳은 바벤베르크 가문이 통치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이곳은 바벤베르크 가문을 이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본거지가 됩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는 거의 650년 동안 지속되었는데요. 전성기에는 유럽 대륙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습니다. 사실 유럽의 어떠한 위대한 왕가도 그토록 오랫동안 광대한 지역에 큰 영향을 끼친 경우는 없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과 통치 시대의 빈은 16, 17세기에 들어 오스만 튀르크, 즉 터키의 침공으로 엄청난 위기를 맞았습니다. 게다가 17세기에는 페스트가 창궐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빈은 이러한 어려움과 고통을 극복한 다음에는 번영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이에 따라 18세기의 빈과 빈 주변에는 수많은 건물들이 세워졌습니다. 음악가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활동한 시기가 바로 그때였죠. 하지만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하는 바람에 빈은 다시 한번 큰 위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그 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많은 세월이 흐른 1848년에 Franz Joseph I가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그는 68년 동안 제국을 통치하면서 빈을 새롭게 개조했습니다.
이때 Ringstrasse라고 하는 순환도로가 건설되었는데요. 이 도로 주변에는 웅대하고 우아한 건물들이 많이 세워져 오늘날 빈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영원히 타오를 것 같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광의 불길은 19세기 후반에 들어 서서히 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핀에서는 역사와 전통의 흐름에 반하는 새로운 불길이 미술, 건축, 음악, 철학, 정신분석학 등 문화 전반에 걸쳐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오스트리아가 1918년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되는 바람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광도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울러, 오스트리아는 바다가 없는 작은 나라로 축소되고 말았던 것이죠.
한편, 빈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시가지가 상당히 많이 파괴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전쟁이 끝난 후 빈의 명소들은 대부분 복구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간직한 이 도시의 심장부는 도심의 순환도로 링슈트라세가 감싸고 있는 지역인데요. 이 지역은 Innere Stadt라고 합니다. Innere Stadt에서도 가장 핵심을 이루는 곳은 슈테판 대성당입니다. 이 고딕 양식의 성당은 빈을 상징하는 건축물이죠. 자 그럼 빈에서 가장 유명한 길인 Kärntner Straße를 따라서 빈의 심장부로 한번 들어가 볼까요?

빈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인 Kärntner Straße는 뮌의 중심지인 제1지구의 중추신경과 같은 거리입니다. 이 거리의 기원은 로마 제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중세에는 비엔나와 캐런튼 지방을 연결한다고 해서 이런 도로명이 붙어졌습니다. 캐런튼 지방은 베네티아로 향하는 관문으로 이탈리아 및 슬로베니아 국경과 맞닿아 있죠. 현재의 Kärntner Straße는 빈의 교통의 요지인 칼스플락스와 빈 시가지의 핵심인 슈테판 대광장으로 연결되는 약 800m 구간의 거리입니다. 이 구간에는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이 있는데요. 이 오페라 극장 뒤에서 슈테판 광장까지 약 550m에 달하는 보행자 구간은 다양한 고급 매장과 카페들이 늘어서 있는 빈 최고의 번화가 중 하나입니다.
이 보행자 구간은 빈 국립오페라 극장 뒤에 있는 호텔 자흐의 동쪽 코너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 호텔은 자흐 토르테라는 케이크로 상당히 유명하죠. 이 거리를 따라 북쪽으로 스테판 대성당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은 ‘모스틀리 모차르트’라는 모차르트 관련 기념품을 파는 매장이 눈에 띕니다. 위는 모차르트가 생애 마지막 10년을 살았던 곳이기 때문에 이곳에는 그와 관련된 얘기가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만약 모차르트가 지금 살아있다면은 음악 저작권 외에도 자기 브랜드를 빌려주고 저런 매장에서도 얼마나 많은 부수입을 올릴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류 역사상 저작권이란 개념은 Mozart가 죽은 지 몇 년이 지난 다음에야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도입되었으니 만약 그가 35살에 죽지 않고 프랑스에 가서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은 만년에 그래도 엄청난 부를 누릴 수 있었겠죠.
이 보행자 구간의 중간쯤 오른쪽에는 Steffl 백화점이 있는데요. 모차르트는 바로 이 건물 뒤쪽 좁은 길Rauhensteingasse 8번지에서 1791년 12월 5일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가 살던 아파트가 있던 건물은 1849년에 헐리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상업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피아렌트너 슈트라스와 슈테판 광장이 만나는 부분에는 왼쪽으로 또 다른 번화가인 그라벤이 연결이 됩니다. 그라벤에 관한 이야기는 잠시 후 별도로 다루겠습니다. 슈테판 광장에는 고딕 양식의 슈테판 대성당이 하늘 높이 솟아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성전 중 하나로 손꼽히죠. 그런데 이 슈테판 대성당 앞에는 주변의 건물들과는 확연히 다른 이질적인 현대 건축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건물의 외벽을 전체적으로 보면 유리와 돌로 곡면으로 처리되어 스테판 광장과 그라벤을 자연스럽게 연결합니다. 외벽 밖으로 돌출된 원통 아랫부분에는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석재가 비대칭적으로 처리되어 전체적으로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하스하우스라고 불리는데요. 빈 태생의 유명한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가 한 솔라이의 디자인에 따라 1985년에 착공, 1990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계획 단계부터 시민들과 언론으로부터 질타를 받았습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슈테판 대성당은 빈의 지리상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빈 시민들의 마음속에도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는 정신적인 구심점이 되는 성전인데 바로 그 앞에 너무나 생뚱맞은 건물이 세워지는 것을 사람들은 눈 뜨고 보지 못했던 것이죠.
건축가 한 솔라이는 과거의 역사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 장소에 미래를 고대하며 현대적인 건물을 짓고자 하는 신념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시민들을 설득하며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이 건물이 완공되었을 때 당시 언론은 아니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 자리에 저런 건물을 짓다니 저 꼭대기에는 광장 바닥으로 다이빙이라도 하려고 저런 걸 올려놓았는가 라면서 빈정거렸습니다. 매장, 사무실, 레스토랑 카페 등이 들어선 상업 건축인데 주변의 역사적인 건축물들과는 너무나 심한 대비를 이루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런 부조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은 침을 튀겨가며 비난했던 것이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건물은 서서히 빈 중심가의 또 다른 아이콘으로 떠올랐습니다.
특히 하스하우스의 원통형 유리에 비치는 슈테판 대성당의 모습을 보면은 이 건물은 역사에 묶여 있던 차분한 분위기의 빈의 심장부에 현대라는 새로운 시간 개념을 강하게 불어넣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스테판 대성당을 보면 남쪽 면에 높은 첨탑이 하늘을 찌르듯 솟아 있습니다. 이 첨탑의 정상부는 맨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카메라로 찍어서 확대해보면 쌍두독수리상이 보이고 그 위에 십자가가 올려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독수리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징이죠. 그럼 대성당의 지붕을 한번 볼까요? 지붕은 수많은 여러 가지 색깔의 타일을 덮어 기하학적인 무늬로 모자이크처럼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는데요. 이곳에서도 독수리문양이 보입니다. 사실 스테판 대성당은 합스부르크 왕가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요. 성당 지하에는 합스부르크 왕가 황제들의 내장을 담은 납골함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한편, 첨탑은 1368년에 착공해 65년 만인 1433년에 완공된 것인데요. 높이가 약 136m가 되니 빈 중심가에서 가장 높은 건축 구조물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몇 km 떨어진 곳에서도 잘 보입니다. 또 이 첨탑은 유료 엘리베이터로 올라갈 수도 있는데요. 빈 시가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전망탑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첨탑은 그냥 짓다 보니 그렇게 높게 된 것은 아니고 확실한 근거에 의합니다. 즉, 구약성서 창세기에서 언급된 노아의 방주의 길이인 300큐비트에 맞춘 것입니다. 참고로 고대의 1큐비트는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 길이로 약 45에서 46cm에 해당합니다.
그런가 하면 스테판 대성당의 북쪽 면에 세워진 종탑을 보면은 높이는 남쪽 첨탑의 반 정도인 약 68m인데요. 마치 짓다 망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 탑을 세우던 중 빈은 오스만 튀르크 군대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이 종탑을 세우는 데 필요한 노동력을 도시 성벽을 보강하는 데에 집중적으로 투입해야 했던 것이죠. 이 종탑의 종은 빈 시민들은 푸메린이라고 부르는데요. 이 종은 빈 시민들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매년 12월 31일 재야의 종소리는 바로 이곳에서 흘러나오니 말입니다. 원래의 종은 1683년 빈을 포위하던 오스만 튀르크 군대가 물러나고 나서 노획한 80문의 대포를 녹여 1711년에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이 종은 자신감의 징표였던 것이죠. 하지만 이 종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파괴되는 바람에 1957년에 다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슈테판 대성당의 정면을 한번 볼까요? 정면은 우람한 벽체로 되어 있고 창문들은 상대적으로 작습니다. 따라서 정면은 고딕 양식이 아니라 그 이전 시대에 풍미했던 로마네스크 양식이 강합니다. 슈테판 대성당은 사실 1147년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처음 건축된 후 세월이 흐르면서 스타일이 바뀌었습니다. 정면의 상부를 보면 양쪽에는 탑이 당나귀의 귀처럼 세워져 있는데요. 이것을 이교도의 탑이라고 합니다.
이교도의 탑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곳에 고대 로마의 신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ARCH 입구도 고딕 양식이 아닌 이전 시대의 양식입니다. 그러니까 스테판 대성당은 원래 이곳에 세워졌던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의 입구 부분은 그대로 살린 채 나중에 전체적으로 고딕 양식으로 확장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있습니다. 그런데 입구는 신기하게도 거인의 문이라는 뜻으로 Riesentor라고 불립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요? 옛날에 기초공사를 하기 위해 땅을 봤더니, 엄청나게 큰 뼈가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이 노아의 홍수 시대에 물에 빠져 죽은 거인의 발뼈라고 생각해서 입구에다가 이런 이름을 붙였던 것이죠. 그렇다면 정말로 거인의 발뼈였을까요?
사실은 신생대의 맘모스의 뼈였던 모양입니다. 그러면 대성당의 입구 바로 왼쪽 벽을 한번 볼까요? 신기하게도 두 개의 쇠 막대기가 수평으로 박혀 있습니다. 짧은 것은 78.6cm이고 긴 것은 89.6cm인데 아무리 봐도 건물의 구조와는 상관없고 그렇다고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용도일까요? 다름 아닌 옷감 길이의 단위인 HANMA 즉 1야드의 표준으로 긴 것은 일반 옷감이고 짧은 것은 있는 옷감용 표준척도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중세에는 각 나라마다 또 도시마다 도량형 단위가 같더라도 실제는 제각각이었기 때문에 이처럼 표준을 확실히 정해 놓으면은 분쟁의 소지를 많이 줄일 수 있었겠죠. 사실 1야드는 1959년에야 영미권에서 91.44cm로 통일했는데 옛날 빈에서 사용한 일반적인 1야드는 89.6cm였습니다. 어쨌든 이것을 보면은 옛날 일상생활에서 상거래를 하는 데도 교회 역할이 상당히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이처럼 유서 깊은 슈테판 대성당은 빈의 지리상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빈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상징적인 건축물인데요. 오스만튀르크 군대가 빈을 포위할 때도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세워진 후 800년 이상 전혀 끄떡없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즉 제2차 세계대전 마지막 2주일 사이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엄청나게 파괴되었던 것이죠. 전쟁이 끝난 후 빈 시민들은 7년 동안 혼신의 노력을 다해 이 성당을 원래의 모습대로 복구했습니다. 그러니까 슈테판 대성당은 제2차 세계대전의 잿더미에서 부활한 오스트리아의 상징인 셈이죠.

웅장하고 엄숙한 슈테판 대성당 내부에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외부의 빛이 은은하게 퍼집니다. 중앙 제단을 보면 성 슈테판의 순교를 그린 커다란 성화가 있습니다. 슈테판은 기독교 역사에서 첫 순교자로 기록되는데요. 그의 이름은 그리스식으로는 Stephanos (Στέφανος), 독일어로는 스테파노스, 독일어로는 Stephan, 영어로는 tephen, 이탈리아어는 Stefano인데 우리말 신약 성경에는 스테반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군중들의 돌에 맞아 순교한 것은 로마 제국시대 초기인 기원 후 35년경으로 전해집니다. 그런데 35라는 숫자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요. 모차르트는 35세에 세상을 떠났죠.
1791년 12월 5일에 35세로 생을 마감한 모차르트의 장례식은 이 성당 안에 있는 십자가 예배당이라고 하는 작은 예배당 안에서 부랴부랴 거행되었습니다. 이 예배당 바닥에는 유럽에서 오스만튀르크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 전쟁 영웅 오이겐공의 묘소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성당 안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왼쪽 두 번째 높은 기둥 아래를 감고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 고딕 양식의 설교단인데요. 이 설교단에는 서방 기독교의 4대 교부인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암브루시우스, 성 히에로니무스 성 그레고리우스의 얼굴이 보입니다. 그런데 더 눈길을 끄는 것은 그 아래에 빵딱 모자를 쓰고 창문을 통해 몸을 밖으로 살짝 내고 있는 남자의 모습입니다. 그는 오른손에 콩팥을 쥐고 있는데요. 도대체 누구일까요?
그의 모습은 이성당의 안쪽 왼쪽 벽에 있는 오르간의 좌대 아래도 보입니다. 마치 오르간 좌대를 등으로 받치고 있는 듯한 그는 손에 콤파스와 직각자를 들고 있는데요. 그 아래벽에는 MAP가 1513년에 제작했다는 큼지막한 문구도 보입니다. 고득시대의 예술가나 건축가들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놓는 일은 없었는데 이것은 아주 이례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인물의 이름은 안톤 필그람입니다. 그러니까 MAP는 다름 아닌 마이스터 안톤 필그람의 약자입니다. 안톤 필그람은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보다 15살 많은 예술가였습니다. 한편, 미켈란젤로의 아버지는 아들이 조각가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해 처음에 완강히 반대했습니다.
왜냐면, 예술가의 사회적 위상이 당시만 하더라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당시에 이곳에서 안톤 필그람은 작가의 사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보란 듯이 자신의 얼굴을 왠만한 성인의 얼굴 크기로 당당하게 조각해 넣었으니 사회적 위상이 상당히 높았다는 뜻이 아닐까요? 한편, 설교단 아래 인물은 안톤 필그람이 아닌 다른 예술가라는 설도 있지만은 어쨌든 고득 예술의 대가였음에는 틀림없습니다. 성당 내부에는 눈길을 끄는 조각상이 하나 또 있습니다. 북쪽 탑으로 올라가는 입구 건너편 벽에 있는 고통의 예수 그리스도의 조각상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빈 사람들은 이 조각상을 두고 치통의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이 조각상은 15세기에 제작됐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성당 밖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조각상에 꽃을 바치곤 했는데 꽃이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전으로 조각상에 묻곤 했습니다. 하루는 세 명의 청년이 지나가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천으로 둘러싸인 것을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치통을 앓는 것 같다고 깔깔대며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세 명 모두 각자의 집에서 원인 모를 심한 치통을 앓게 되자 이곳에 와서 회개했더니, 치통이 말끔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누가 지어낸 것인진 모르지만 어쨌든 이런 얘기 때문에 이 조각상은 치통의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스테판 대성당은 기독교 성전이지만 그 안에는 종교적 엄숙함이나 거룩함과 직접적으로 관계없는 다양한 요소들도 공존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람들에게 은근히 즐거움을 선사하는 듯 말입니다.

빈이라면 음악의 도시죠. 사실 빈만큼 그토록 많은 음악가들이 활동한 도시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빈은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음악의 성지나 다름없는 곳입니다. 빈에서 활동한 음악가라면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부르크나 브람스 말러 등과 같은 대음악가들이 먼저 머리에 떠오르지요. 그중에서 모차르트의 자취를 한번 살펴볼까요? 참고로 모차르트의 현지 발음은 Mozarthaus입니다. 모차르트는 1756년에 잘츠부르크에서 음악가의 아들로 태어났죠. 그런데 당시 음악가들은 그들을 하인 정도로 취급하는 왕족이나 귀족에게 예속되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잘츠부르크 대주교 밑에 있던 청년 모차르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 독립된 음악가로서 자유의 길을 걷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25살 때 새로운 삶을 찾아 제국의 수도 빈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빈에서 10년 동안 살면서 모두 13번 이사했습니다. 빈에는 그가 살던 집 중에서 단 한 곳만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슈테판 대성당 뒤쪽 골목 돔가세 5번지에 있는 모차르트 하우스인데요. 보통 피가로 하우스라고도 합니다. 모차르트는 이 아파트에서 2년 반 동안 살면서 많은 곡을 썼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입니다. 피가로의 결혼은 프랑스의 작가 보마르셰의 희곡이 원전입니다. 모차르트가 부인 콘스탄세와 이 집으로 이주한 것은 1784년 9월 17일이었습니다.
바로 그해 4월 27일에 프랑스 파리에서는 보마르셰의 희곡 피가로의 결혼이 루이 16세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무대에 올려졌습니다. 그러니까 1789년에 프랑스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나기 5년 전이었죠. 파리에서 이 연극을 본 관객들은 열광했습니다. 특히 이 작품 중에 하인 피가로가 주인인 백작을 향해 내뱉는 대사는 과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백작님 당신은 귀족, 신분, 재력, 지위, 영향력 등 이런 것들을 모두 지녔다고 우쭐대죠. 하지만 그처럼 많은 특권을 얻기 위해 당신이 스스로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세상에 태어나는 수고를 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게 없지 않습니까?
이처럼 이 희곡은 당시 신분제도에 정면으로 도전한 파격적인 작품이었으니 프랑스 시민혁명은 바로 이 작품에서 시작되었다. 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한편, 모차르트는 그해 12월에 프리메이슨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프리메이슨은 18세기 중엽 계몽주의 사상에 뿌리를 두었던 초종파적 남성 결사단체였습니다. 이 단체는 봉건적 절대주의 전제정치에 반대하는 진보적인 이념을 표방하고 있었는데, 유럽의 교양층 인사들 상당수가 회원이었습니다. 이런 프리메이슨의 영향을 받았던 모차르트는 보마르셰의 희곡을 하루속히 오페라화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탈리아 출신의 궁정 대본 작가 로렌소 다 폰테와 의기투합하여 1786년에 빠른 속도로 이 오페라를 작곡해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는 이 오페라의 공연을 금지했습니다. 귀족 주인에 대한 하인의 승리를 담은 내용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대본 작가 다폰테는 사회 질서를 해칠 만한 첨예한 정치적인 요소는 삭제해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오페라는 그해 5월 1일에 궁전극장의 무대에 올려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명작 오페라 피가로의 결이 탄생한 이 집은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모차르트 관련 많은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 아파트는 큰 방이 4개, 작은 방이 2개, 또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상당히 넓은 편입니다. Mozart 부부가 이 방들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실내는 그가 살던 시대의 모습대로 어느 정도 재현해 놓았습니다. 그중에서 당구대나 카드놀이, 탁자 등은 도박에 빠져있던 그의 삶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곳은 그가 살던 집 중에서 가장 넓었으며 집세도 가장 비쌌습니다. 그렇다면 수입이 적지 않았다는 뜻이죠. 모차르트는 돈에 늘 쪼들렸다고 하지만은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는 살스부르크에서 빈에 오자마자 순식간에 유명해져가지고, 작곡가나 피아니스트로서 또 피아노 가정교사로서 남보다 훨씬 많은 수입을 올렸습니다. 그의 1년 수입은 당시 귀인의 병원 원장의 수입의 8배가 넘었다고 하니까 엄청난 고소득자였던 셈이죠. 모차르트는 이곳으로 사람들을 종종 초대하기도 했고 또한 전용 이발사, 요리사, 하녀도 고용했고 또 승마용 말을 사들이고 값비싼 옷을 입고 고급 음식에다가 온갖 사치를 다 부리며 생활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그 많은 수입이 바닥나는 것이 아닌데도 그는 한 프리메이슨 회원에게 걸핏하면 돈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도박 빚을 갚기 위한 것이었을 겁니다. 당시 도박 빚을 곧 갚지 않으면 불명예로 간주되었고 갚지 못할 정도로 과도한 빚을 지게 되면 사회적으로 매장되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그는 집을 옮겨 다니며 돈에 쪼들리다가 1791년 서른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평생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살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이탈리아 공인건축사이자 작가인 정태남은 건축 외에도 미술, 음악, 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동했다. 국내에서는 주요 기관과 기업에서 하는 강연과 주요 매체에 기고하는 많은 칼럼을 통하여 유럽 문화와 역사의 현장에서 축적한 ‘앎의 기쁨’을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로마역사의 길을 걷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프라하-비엔나-브라티슬라바-부다페스트)』,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에도 여러 권이 있으며, 특히 EBS의 세계테마기행 『이탈리아, 빛나는 시간을 찾아서』(1~4부)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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