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해!', '예쁘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전시품과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이곳 ! 호프부르크 궁전 유일한 한국어 가이드로 알차고 야무지게 관람하자!
목차
55 트랙2시간 15분
인사말
투어 소개
[미리 듣고 가기] 합스부르크 1탄
안녕하세요. 투어 시작 전 이렇게 미리 찾아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이번 오디오 안내에서는 호프부르크 왕궁을 둘러볼 때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를 여행하시는 모든 분들께 정말 유용한 상식이 될 수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역사에 대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640년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파란만장한 여정을 쭉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0세기에 유럽을 통치하던 신성 로마 제국 안에 포함된 스위스 북쪽 지역의 작은 가문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이들이 거주하던 성의 이름은 메이 성이라는 뜻의 합스부르크였는데요. 그 이름이 계속 이어지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늘날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역사로 남게 된 것입니다. 소영주에서 시작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계속해서 영토를 확장해 나가다가 13세기에 아주 좋은 기회를 잡게 됩니다. 바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것인데요.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은 유럽의 상당한 부분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이들은 1254년부터 1273년까지 황제 없이 제후들만 존재하는 대공위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제후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황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강력한 황제의 출현을 원치 않았습니다. 따라서 제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1세를 황제로 선출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는데요. 연방 작은 국가인 보헤미아의 오토카르 2세 왕이 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로돌프 1세는 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오토카르 왕과 마르 히펠트 전투를 치렀고 전투에서 승리한 후 보헤미아 영토까지 병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정략결혼을 활용해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의 슈타이어 마르크 지역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최초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선출되었고 그렇게 그들은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로돌프 1세가 죽고 그의 아들 알브레히트 1세가 1308년에 암살당한 뒤로 성장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한 제후들은 더 이상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선출하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315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였던 스위스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그들과 모르가르텐 전투를 치른 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 지역에서마저 지배권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무너지지 않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로 본격적으로 근거지를 옮겼고요. 오스트리아 공작이라는 직위를 갖고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세력을 키우기 위해 또다시 정략 결혼이라는 방법을 활용했는데요. 영주들과의 결혼을 통해 케른텐 티롤 클라인 등 남동쪽 지역에서 세력을 얻었고 영토를 계속해서 확대해 나갔습니다. 그러던 와중 또다시 1437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가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지기스문트의 사위였던 합스부르크 가문 알브레히트 2세가 황제로 선출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1740년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재위를 계속 이어나가게 된 것입니다. 이후 15세기 중반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던 왕들은 오스트리아 공작에서 오스트리아 대공으로 직위를 승격시켰고 그간 펼쳐두었던 정략개론이 빛을 발하며 합스부르크 가문은 후계자가 끊긴 오늘날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역까지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또 마침내 얽히고설킨 정략결혼이 모여 카를 5세는 에스파냐 즉 스페인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직위를 물려받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은 엄청난 권력을 한 곳에 집중시켰습니다. 동락 결혼 외에도 1529년에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인 1차 빈 포이전에서 승리해 헝가리 보헤미아 왕국의 지배권까지 획득하며 합스부르크 왕관은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들에게 또 한 번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시작은 1517년 마르틴 루터에 의해 일어난 종교 개혁이었습니다. 당시 교회에는 부정부패가 너무나 만연했고 성당 보수 공사 비용을 마련한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팔거나 교황의 사치가 심했기 때문에 종교 개혁을 지지하는 신교파가 생기면서 가톨릭을 믿는 구교파와의 갈등이 깊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갈등으로 독일 전역이 동요하게 되었고 이를 무시할 수 없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아우쿠스부르크 제국회의를 통해 신교의 자유를 허용해 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급한 불은 끌 수 있었으나 카를 5세가 사망한 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는 하나의 거대한 연결된 집단이 아니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본 영토와 스페인 부근의 영토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카를 5세가 사망한 후 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어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를 통치했고 카를 5세의 아들인 펠리프 2세는 에스파냐계 합스부르크를 통치하게 됨에 따라 합스부르크는 1556년 두 지역으로 나뉘게 됩니다. 이후 1618년 페르디난트 2세가 새롭게 황제로 선출되면서 선왕 카를 5세가 선언했던 종교 자유를 보장하는 칙령을 취소해 버렸고 신교를 박해하고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신교를 따르던 보헤미아 지역 의회에선 페르디난트 2세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프리드리히 5세를 자신들의 황제로 내세워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30년 종교 전쟁의 서막입니다. 패권 장악에 눈독을 들이던 유럽 여러 나라들은 이때다 싶어 종교 전쟁에 참여했고 30년간 지속된 전쟁 끝에 1648년 독일의 영방들은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라 각자의 주권을 행사하게 되었고 제후국들이 독립해 나감에 따라 신성 로마제국은 명실상부한 제국이 되어버렸습니다.
[여행전듣기] 합스부르크 2탄
미하엘 광장 (Michaelerplatz)
호프부르크 왕궁 투어가 시작되는 이곳은 미하엘 광장입니다. 먼저 호프부르크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소개해 드리자면 비엔나의 중심부에 위치한 이 왕궁은 13세기 무렵에 처음 건축된 이래로 오스트리아 군주 정치가 막을 내린 1918년까지 640년 정도의 기간 동안 합스부르크 왕가의 겨울 궁전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이 왕궁은 황제들의 거주지 그 이상의 기능을 했는데요. 국민들의 청원과 그에 대한 응답이 이곳에서 이루어졌고 궁 내부의 연회장에서는 만찬 행사나 수천 명의 사람들을 위한 연회도 종종 열리곤 했습니다.
때문에 후프부르크 왕궁은 지금까지도 단순히 박물관으로서 기능을 하는 것을 넘어서서 대통령 관저로서 사용됨과 더불어 대통령 집무실과 국제회의실 비엔나 학생들을 위한 도서관 연말 무도회장 등등 다양한 용도로 이용되면서 비엔나의 중심부로서의 역할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건축 양식에 대해서도 살펴보면 독특하게도 이 왕궁은 한 번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통치자가 바뀔 때 그에 따라 왕궁도 여러 번 증축되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호프부르크 왕궁은 일반적인 과거 유럽 왕궁의 모습과는 달리 비대칭적인 형태로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르네상스 양식 바로크 양식 네오바르크 양식과 같은 다양한 건축 양식을 띠게 되었고 이 양식들이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왕궁으로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여러 번의 증축 과정을 거치면서 완성된 왕궁의 면적은 축구장 약 34배에 달하는 24만 제곱미터나 된다고 합니다. 또한 원래는 성벽이 이 궁전을 둘러싸고 있었다가 19세기에 이를 제거한 후 광장과 정원이 조성되었고 이후 신안군까지 건설을 마쳐 지금의 멋진 호프부르크 궁전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정면에 보이는 건물은 성미하일관입니다. 호프부르크 왕궁의 정문으로서 기능하는 이 미하엘동은 19세기의 건축가 페르디난트 키르슈너에 의해서 지어졌습니다.
왕궁 입구에 여러 개의 거대한 조각상들을 세워줌으로써 합스부르크 왕가의 힘과 명성을 나타냈고 지붕에도 월계관을 들고 있는 천사나 칼을 들고 있는 독수리 조각들을 함께 장식해둠으로써 당시 통치의 미덕이었던 지혜 정의 그리고 힘을 표현했습니다. 마차와 차가 다니는 가운데 입구를 기준으로 서 있는 4개의 조각상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이는 그리스 신화 최고의 영웅으로서 힘과 용기를 상징하는 헤라클레스의 조각상인데요. 호프부르크 왕궁 안에는 8개의 헤라클레스 조각상이 있습니다. 그중 4개가 이 미하일 광장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제일 왼쪽에서부터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헤라클레스 아래 뱀이 보이실 텐데요. 이는 머리가 9개 달린 괴수 히드라입니다. 헤라클레스는 처자식을 죽인 죄를 싣기 위해 12개의 과업을 완수해야만 했는데요. 그중 두 번째 과업이 바로 머리를 베어도 다시 생겨나는 괴수 히드라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조각상은 바로 그 괴수 히드라와 싸우고 있는 헤라클레스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두 번째 조각상은 여왕 히폴리테의 허리띠를 가져와야 하는 헤라클레스의 아홉 번째 과업을 수행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세 번째 조각상은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죄로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는 벌을 받고 있는 프로메테우스와 그를 구해주는 헤라클레스의 모습입니다. 자세히 보면 정말 디테일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나요?
제일 오른쪽 조각상은 하데스의 지하세계를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를 잡아가는 헤라클레스의 모습입니다. 케르 베로스는 머리가 3개 달렸고 용의 꼬리를 가진 데다 등에는 뱀의 머리를 한 모양이 인상적인데요. 이를 잡아가는 것이 헤라클레스의 열두 번째 과업이었습니다. 그럼 이제 합스부르크 왕가의 기운을 그대로 받으면서 미할 광장 정문을 지나 구왕궁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층 A룸] 실버 컬렉션 [Silberkammer]
동상들이 서 있는 정문을 지나 후프부르크 궁전 안으로 들어오셨나요? 들어오시면 오른쪽에 시시박물관이 보일 텐데요. 입장권을 끊어서 들어가시면 실버 컬렉션 시시박물관 황제의 아파트먼트 순서로 쭉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입구에서 티켓을 구매하실 때 궁전 지도도 함께 요청하시면 호프부로크 왕궁 전체에 대한 대략적인 지도도 받으실 수 있습니다. 투어가 끝난 후 호프부로크 왕궁에 대해 되짚어 볼 때 유용하니 하나 챙기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모든 준비를 마치셨다면 저희 투어의 가장 첫 번째 박물관 실버 컬렉션 투어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먼저 실버 컬렉션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드리겠습니다. 1918년 합스부르크의 통치가 막을 내린 이래로 과거 황실 여러 부서에서 사용하던 주방 용기들과 식기들이 코르세버 엔테이블 룸이라는 이름으로 여기에 모였습니다.
이는 1923년 궁전 도자기 궁전 제과기고 궁정 와인 저장고 궁전 주방 그리고 각종 직물류를 전시해 놓은 궁정 리넨룸과 같은 주제로 분류 전시되어 실버 컬렉션이라는 박물관으로 대중들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저희는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을 위주로 살펴보겠습니다. 장식장에 붙어있는 번호를 따라 안내를 들어주시면 됩니다. 들어가시자마자 바로 오른쪽에 2번이라고 적혀있는 장식장을 발견하셨나요? 이 장식장에 진열되어 있는 것들은 궁정 부엌에서 사용하던 구리 용기 펜 그리고 각종 금형틀입니다.
주전자 냄비 솥 그리고 뚜껑에 석탄을 넣어 음식을 따뜻하게 유지해주는 식기들까지 이곳에 진열된 구리 용기들을 통해 최대 5천 명에 달하는 궁정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당시 구리는 귀족이나 중산층 가정의 주방용품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소재였습니다. 구리는 열을 잘 전달한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산성 식품과 만날 경우 푸른 녹이 발생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같이 존재했습니다. 때문에 이 독성 푸른 녹을 막기 위해서 이곳에 있는 식기들은 주석 처리를 거쳐야 했고 궁정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정기적인 점검도 받아야 했습니다. 또한 당시 황실 부엌은 화재의 위험으로부터 황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했습니다.
때문에 음식을 식단까지 가지고 올 때 음식이 식을 수 있었고, 공기 자체에 석탄을 넣을 수 있게 제작해 황제가 식사를 할 때 음식이 따뜻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1층 B룸] 실버 컬렉션 [Silberkammer]
그럼 이제 비룸의 첫 번째 방 올드 실버 룸으로 다들 들어오셨나요? 이곳에는 합스부르크 왕과 군주 정치 시절에 사용되던 오래된 은식기들과 접시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과거 비엔나의 식기구들뿐만 아니라 헝가리 및 보헤미안의 도자기 식기 세트들도 이곳에 함께 진열되어 있는데요. 그중 중앙에 있는 포크와 나이프들은 황실에서 사용하던 은식기입니다. 1837년 슈테판 메이어 호퍼가 만들기 시작한 식기들은 이후 후계자들이 이를 계승해서 만들어 나갔고 현재까지도 국가적 연애에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식기구 끝부분에 섬세한 패턴의 모양들을 자세히 보시면 식기구 하나하나 섬세한 문양들이 조각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쭉 둘러보시고 7번 앞에서 계속 설명 이어 나가겠습니다.
이번에는 비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7번 도그만 은식기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이곳에 진열되어 있는 도금 은식기들은 프랑스 금세공인에 의해서 만들어졌는데요. 이 식기 세트들이 비엔나로 넘어오는 과정에는 나폴레옹의 흥망세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808년 처음 이 호화로운 식기구들을 의뢰한 사람은 아마도 나폴레옹의 조카인 유진드 보아르네였을 것입니다. 식기세트들은 1805년부터 1815년 보아르네가 부통령으로 통치하던 이탈리아 밀라노의 궁전에서 사용되기 위한 용도였습니다. 10기 세트가 완성된 이후 밀라노로 옮겨졌으나 나폴레옹이 현재 이탈리아 영토인 론 바르디아 베네치아와의 전투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론 바르디아 베네치아 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 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 10기 세트들은 갈 곳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때 마침 1816년 오스트리아 프란츠 2세 황제는 그의 마지막 아내인 캐롤라인 아우구스트와의 결혼을 예정하고 있었는데요. 프란츠 황제가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위해서 궁정에서 사용하던 모든 금속 식기들을 녹여버렸기 때문에 비엔나 궁정에는 황제의 결혼식처럼 특별한 연애를 기념할 만한 식기구들이 남아있지 않았었습니다. 따라서 비엔나 의회에서 이 식기구들을 구매하기로 결정 내렸고 프란츠 황제는 보아르네로부터 이 식기세트들을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1816년 40여 점의 식객 세트들은 비엔나로 들어오게 되었고 그 무렵 오스트리아를 통치하고 있던 나폴레옹이 세력을 잃으면서 오스트리아에 있는 나폴레옹의 문장도 오스트리아 황제의 것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이후로도 이 식기 세트들은 궁정 행사에서 변함없이 사용되었는데요.
연회가 커질수록 많은 손님들에게 제공하기는 식기구들이 부족했기 때문에 도그만 식기 세트들과 색을 맞추기 위해 비엔나에 있던 은식기들은 금빛 색을 띠는 샤프란으로 칠해져야만 했습니다. 그에 따라 1854년 비엔나의 금세공인인 메이어 호퍼랑 클린코슈에게 추가적으로 60개의 테이블을 수용할 수 있도록 도군된 식기들을 더 만들 것을 명령했고 1869년 비엔나 음세공인들이 140개의 식기구들을 추가로 제작했습니다. 그렇게 개수를 점차 확장해 나가면 현재 이 식기 세트들은 총 4500여 점에 달하고 그 무게는 천 킬로그램이 넘는다고 합니다. 설명은 씨룸에 9번이 붙어있는 식기 세트 앞에서 이어 들어주시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