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성당 역사

세비야 대성당은 입장하는 문이 자주 변동됩니다. 지도를 하나 첨부하였으니 확인해 주세요. 대성당에서 직접 현장 구매를 할 경우에는 왕자의 문으로 입장하게 되는데요. 표 검사와 가방 검사를 한 뒤 전시관을 먼저 관람하게 됩니다. 전시관을 지나서 성당 안으로 들어가신 뒤 오른쪽으로 꺾으시면 바로 지도에 1번 장소인 콜럼버스 무덤이 보입니다. 온라인에서 구매하셨거나 살바도르 성당에서 통합권을 구매하셨다면 히랄다 탑 아래에 있는 입구로 입장하시면 됩니다. 히랄다 탑 아래로 입장하셔서 첫 번째 투어 장소인 콜럼버스 무덤까지 지도를 참고해 주셔서 이동하시면 되는데요. 혹시 길 찾기가 어려우시다면 근처 직원에게 '돈데에스타 라뚜바 데걸론'이라고 물어보시면, 직원이 방향을 알려주실 겁니다.

세비야 여행을 계획하시면서 히랄다 탑을 알게 돼서 '나도 히랄다 탑 가봐야겠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히랄다 탑이 세비야 대성당 안에 있는 걸 모르시더라구요. 히랄다 탑은 세비야 대성당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걸어서 꽤 높이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편한 운동화 꼭 착용해 주시구요. 물도 꼭 챙겨가시길 바랍니다. 대성당 주변에는 집시 여인들이 점을 봐주겠다면서 나뭇가지를 들고 접근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무시하시고 지나가 주시면 됩니다. 스페인어로 점 내용을 말할 텐데 알기 어려우실 뿐더러, 끝나고 나서 과도한 돈을 요구하실 수도 있으니 주의하세요. 혹시 그 나뭇가지를 어디서 구하는지 궁금하시다면 인디아 문서 보관소 앞에 작은 정원에 가보시면 찾으실 수 있습니다. 대성당이라고 소매치기로부터 안전하지는 않습니다. 이전의 한 여행자 분께서는 대성당을 구경하시다가 가방을 소매치기 당하셔서 여권까지 도난 당해 비행기를 탑승하지 못해서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마드리드 대사관으로 여권을 재발급 받으러 가신 적도 있습니다. 세비야 대성당에는 복장 제한은 없습니다. 다만 겨울에는 대성당 안이 돌로 만들어져 추울 수 있으니까 따뜻하게 입고 가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우선 대성당의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성당은 단순히 가톨릭 교도만을 위한 종교적인 장소가 아닌, 스페인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역사적인 장소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랜 기간 인류의 역사 속에서 중심에 있었던 도시 세비야에는 로마인, 고트족, 아랍인 등 다양한 민족들이 흔적을 남겼는데요. 대성당은 연 200만의 사람들이 찾는, 세비야를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세비야 대성당 자리에는 모로코에서 건너온 알모아드족이 만든 거대한 모스크가 있었습니다. 모스크는 1182년 먼저 완공이 되었고 지금도 남아있는 히랄다 탑은 1198년에 건설이 끝났습니다. 1248년 페르난도 3세가 세비야에 있는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난 뒤, 모스크는 그 모습을 유지하면서 성당으로 활용되었습니다. 그러다 1356년, 지진이 일어나 일부분이 무너졌는데요.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가톨릭으로 똘똘 뭉쳐 독실했던 스페인 사람들은 새 성당을 짓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 성당이 지어졌을 때 사람들이 미쳤다고 생각할 정도로 큰 성당을 만들 계획을 세웠습니다.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는 1401년이었습니다. 우선 지진으로 무너진 이슬람 사원을 철거한 뒤, 당시 유행했던 고딕 양식으로 성당을 새로 짓기 시작했습니다. 세비야 대성당은 지은 지 100년이 지나 1506년에서야 완성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놀랄 만한 크기를 자랑하는데요. 당시 사람들에게는 세비야 대성당은 정말 미쳤다고 생각할 만큼 컸습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제일 큰 성당이었습니다. 그 이후 1626년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완공되고 난 뒤 두 번째로 큰 성당이 되었다가, 1710년에 런던의 세인트폴 대성당이 지어지면서 세비야 대성당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이 되었습니다.
성당의 외관에서는 고딕 양식을 잘 보실 수 있는데, 성당 내부에서는 고딕 양식뿐만 아니라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도 보실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당 외부가 먼저 공사가 끝났고요. 내부의 예배당이나 기타 부속시설은 필요에 따라 추가적으로 건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건설 시기가 각각 다르고 당시 유행하던 건축 양식이 달랐기 때문에 결국에 성당 내부에서는 수백 년에 걸친 다양한 건축 양식이 나타나게 됩니다. 대성당은 지어진 지 50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만큼 보수공사는 끝이 없습니다. 성당의 외관을 보시다 보면 유난히 돌의 색이 주변에 하얀 부분을 보실 수 있는데요. 이 부분은 모두 최근에 보수공사를 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세비야 대성당에서는 입장권 금액의 30%를 이 보수공사에 사용한다고 합니다. 2008년 15세기 후반 쓰이던 대성당의 원본 설계도가 발견되면서 대성당이 어떻게 건축되었는지 연구할 수 있게 되었는데요. 이 설계도를 바탕으로 앞으로 대성당을 좀 더 잘 보존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00:00 대성당의 의미
00:28 대성당의 역사
01:46 대성당의 건축 양식

콜럼버스에 관련해서는 들려드릴 이야기가 워낙 많기 때문에 이렇게 미리 듣기 챕터를 준비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콜럼버스의 무덤을 보신다면 훨씬 더 재미있으실 겁니다. 일단은 콜럼버스 이야기를 앞서 유럽의 역사를 간단히 설명드려야 이해가 잘 될 것 같습니다. 1453년 동로마 제국이 무너졌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볼게요.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이름을 바꾸고 수도로 삼았습니다. 이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앞으로 유럽에 진출하겠다는 선전포고와도 같았습니다. 동로마 제국은 서유럽 나라들에게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공격을 막아주는 방파제와 같은 역할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동로마 제국이 무너지면서 서유럽 나라들은 직접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상대해야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상인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는데요. 상인들은 실크로드를 통해 가져오는 동양의 물건들로 막대한 이익을 남기고 있었는데, 오스만 투르크가 그 길을 막아서면서 동서양의 교역이 끊겼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에서 만약 누군가 실크로드를 대체할 수 있는 바닷길을 개척하고, 독점적인 지위까지 받는다면 막대한 부와 명예를 가지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이 상황에서 등장한 이가 바로 콜럼버스였죠.
콜럼버스는 제노바 출신의 항해사였습니다. 그러니까 대서양을 횡단해 인도에 도착하는 프로젝트를 가지고 움직인 것은 148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독서광이었던 콜럼버스는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대서양을 계속 항해하면 깊은 세상의 끝으로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인도가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대서양 항해는 그런 믿음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막대한 자본과 추후 발견 뒤 그의 지위와 부를 보장해주는 국가와의 협력도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맨 처음 그 계획을 포르투갈의 왕에게 가져갔습니다. 당시 포르투갈은 항해사를 양성하는 큰 학교가 있었고, 유능한 항해사와 대항을 항해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왕은 콜럼버스의 계획에 대한 지원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왜냐하면, 포르투갈은 이미 아프리카 대륙을 빙 둘러서 인도로 가는 길을 개발하는 중이었고, 이에 많은 시간과 돈을 벌써 투자한 뒤였기 때문입니다.
콜럼버스가 다음으로 찾아간 나라가 바로 스페인이었습니다.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함께 유럽에서 항해 기술이 제일 발달한 나라였습니다. 콜럼버스는 1485년에 스페인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운이 좋게도 세비야 카르트와 수도원에서 왕과 자신의 만남을 주선해 주겠다는 수도사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그 수도사와 함께 그라나다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사벨 여왕을 찾아갔습니다. 콜럼버스는 열심히 자신이 준비한 계획들을 이야기하며 자신을 지원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왕은 콜럼버스에게 당장 답을 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들은 그라나다에서 마지막 남은 아랍인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1479년 포르투갈과 알칸소바스 조약을 체결했는데 대서양을 항해해서 인도로 가는 것이 조약에 위배되지 않는지를 알아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사벨 여왕이 검토해 본다고는 했지만, 이 대답은 포르투갈 왕의 대답보다는 훨씬 긍정적인 것이기는 했습니다. 포르투갈의 왕은 단번에 그의 계획을 안 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콜럼버스는 세비야로 돌아와서 현재 카르투와 수도원이 있는 곳에서 머물며 허락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여왕으로부터는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1488년에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갔습니다. 포르투갈의 왕이 콜럼버스를 다시 한번 보자고 편지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왕을 만나 다시 한번 대서양을 가로질러 인도로 가는 항로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포르투갈의 왕은 생각하더니 또다시 거절을 했습니다. 그 해가 마침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노 디아스가 아프리카 희망봉을 발견한 해였기 때문입니다.
콜럼버스는 실의에 빠져 다시 세비야로 돌아왔습니다. 콜럼버스는 그를 지지해주는 후한데 라세르다의 집에서 2년간 그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그 후 그는 다시 우엘바의 라비다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겨 여왕의 부름을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카톨릭 왕들이 그라나다를 점령하기 전 1491년 11월 25일, 콜럼버스를 그라나다로 호출했습니다. 콜럼버스는 그라나다로 향했고, 이사벨 여왕의 임시 거처가 있던 그라나다 근교 산타페에 1492년 4월에 도착했습니다. 콜럼버스는 다음의 조건을 요구했습니다. 발견한 곳에 해군 제독과 왕과 같은 존재인 부왕, 그리고 통치자의 지위, 그가 발견한 곳에서 나오는 10%의 수익, 만약 그가 투자한 배에 대해서라면 20%의 수익. 콜럼버스의 계약서를 본 이사벨 여왕은 많은 투자를 해야 되고 그에게 높은 지위를 세 개나 주어야 하므로 그에게 거절의 뜻을 밝혔습니다. 콜럼버스는 좌절하여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국왕 회계 담당관 루이스 산타넬이 투자에 비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으므로 콜럼버스의 계획을 지원하자고 이사벨 여왕을 설득했습니다.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를 다시 불렀고, 1492년 4월 17일에 계약서에 사인을 했습니다. 이를 바로 '산타페 조약'이라고 합니다.
콜럼버스는 세비야로 돌아와 우엘바를 오가며 항해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우엘바에서 출발해서 카나리아 섬을 거쳐 결국 신대륙을 발견했습니다. 참고로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그가 발견한 곳이 인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콜럼버스는 1493년 3월 13일에 신대륙의 특산물과 원주민을 싣고 팔로스 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사벨 여왕은 그를 약속한 대로 신대륙의 부왕으로 임명했습니다. 콜럼버스는 자신의 꿈을 이뤘는데요. 과연 그에게 어떤 일이 펼쳐졌을까요? 이야기가 길어지니 다음 챕터에서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00:00 당시 유럽의 역사적 배경
01:20 콜럼버스 이야기
05:09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콜럼버스는 1493년 9월, 총 17척의 배 그리고 1200명의 대선단으로 2차 항해를 했습니다. 이 2차 항해에서는 콜롬버스가 신대륙에 가면 많은 황금을 가져올 수 있다고 하여 이사벨 여왕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얻어내었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많은 자원자들이 함께 항해를 했습니다. 콜럼버스는 신대륙 부왕이자 총독으로서 원주민들을 금광을 발견하고 채굴하는 데 동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대만큼 많은 황금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원주민들에게 황금 할당량을 주고, 그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손발을 자르라고 명령하기도 했고 사냥개를 가지고 와 개 먹이로 주기도 했습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낸 성과가 보잘것없고 원주민들까지 가혹하게 대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그에 대한 비판이 스페인 궁정 신하들로부터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1494년 말에는 콜럼버스에게 명예롭게 퇴진하라고 권했지만, 콜럼버스는 거절하고 점점 더 잔혹해져 갔습니다. 콜럼버스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원주민을 노예로 삼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이는 이사벨 여왕이 선호하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원주민을 노예로 삼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원주민을 식민지 정부에 두고 세금을 거둬들이는 편이 장기적으로 스페인에게 이득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많은 수의 원주민 노예를 데리고 1495년 2월에 스페인에 귀국을 했습니다.
1498년 5월, 콜럼버스는 3차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새로운 땅을 발견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1500년, 그는 에스페놀라 섬에서 지냈는데 통치를 엉망으로 하고 내부 반란까지 겹쳐 범죄자처럼 쇠사슬에 묶여 스페인으로 다시 송환됩니다. 이사벨 여왕은 그가 세운 공이 있기에 그를 풀어주고 은퇴하여 편하게 살라고 했지만, 그는 신대륙에서 황금을 찾는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고 합니다.
콜럼버스는 1502년 4월 3일, 세비야에서 4차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콜럼버스는 이미 권력도 없고 황금으로 사람들을 선동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이제 선단은 캐러벨 선 네 척으로 아주 초라한 모양새였습니다. 그는 황금을 찾겠다는 열망에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곳을 탐험했습니다. 4차 항해를 하는 동안 온두라스, 니카라과이, 코스타리카, 파나마의 해안을 발견했으며 1504년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해 11월 26일, 그를 후원했던 이사벨 여왕이 숨을 거둡니다. 콜럼버스는 강력한 후원자였던 이사벨 여왕이 죽고 나서 점점 그의 위치가 좁아졌고, 약속받았던 혜택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산타페 조약에서 보장받았던 것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탄원서를 내기도 했지만, 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1506년 5월 19일,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숨을 거둡니다. 그는 스페인에 대한 불만으로 유언을 다음 같이 남겼습니다. '내 시신은 신대륙에 묻어다오. 내가 다시는 이곳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게 해다오.' 자 여기까지 콜럼버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렸는데요. 이어지는 콜럼버스 무덤에 관한 이야기는 콜럼버스 무덤 앞에서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00:00 콜럼버스의 2차 항해
01:26 콜럼버스의 3차 항해
01:54 콜럼버스의 4차 항해
02:22 콜럼버스의 죽음
안녕하세요?
스페인 역사 부문 베스트셀러 <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 <한권으로 읽는 스페인 근현대사> 의 저자 서희석입니다.
가톨릭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공존하는 신비로운 이 나라에 반해 정착한 지 10년이 흘렀습니다.
2015년 친구이자 역사학도인 안토니오 팔마와 함께 스페인 역사책 '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을 집필하였고 2018에는 '한권으로 읽는 스페인 근현대사'를 출간 하였습니다.
또한 스페인 국제 안달루시아 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스페인을 중심으로 한 현대사 및 국제 관계에 대한 지식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스페인의 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 책을 쓰고 공부하면서 얻게 된 지식과 10년 간 스페인에서 지내며 경험하고 알게된 이야기를 여행자분들께 직접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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